Posted by I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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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애를 다시 만난 건 토요일이었다. 토요일에는 수업이 없다만 억울하게도 일찍 눈을 뜨고 말았다. 6시나 됐나, 슬슬 배는 고픈데 아직 아침식사 시간이 되려면 두 시간은 기다려야 했다. 좀 짜증이 치밀었다. 다시 잘까 하는 심정이 안 든 것도 아니었지만 이미 잠은 다 깨버렸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잠옷 차림에 대충 외투만 걸치고 파란 털실 목도리를 둘렀다. 물론 신발만큼은 실내화 말고 다른 걸 신은 채로.
 10월 하순의 6시는 아직 어둡다. 내 손에도, 하얀 잠옷 바지에도 검은 외투에도 새벽빛이 내려앉았다. 서늘한 공기마저 새벽의 그것이다. 학교 전체가 잠든 듯이 고요한 시간에서 나 혼자만이 나무들 사이를 거닐고 있었다. 그 때 좀 떨어진 곳에서 인영이 하나 툭 튀어나왔다.
 부끄럽지만 가장 먼저 든 감정은 공포였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냥 비웃기만 했던 흡혈귀 이야기가 왜 갑자기 그 때 떠올랐는지! 그렇지만 그 순간에는 정말로 무서웠다. 물리면 아플까, 지금 도망쳐야 할텐데 하는 생각도 얼핏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인영이 나무 그림자가 들지 않는 곳으로 나오자, 단숨에 알아보고 다리에서 긴장이 쫙 풀렸다. 그 애였다.
 "깜짝이야, 놀랐잖아. 아직 6시 반도 안됐는데 여긴 무슨 일이야? 기숙사는 아닐 거 아냐."
 소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날 복도에서 만나고 들었던 생각이지만. 정말 필요하지 않은 이상은 입을 열지 않는 것 같았다. 나와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 사람에게는 그냥 머쓱하게 웃어보이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 때다.
 "기숙사는 아니고 이 근처에서 살아."
아, 드디어 말했다. 이걸로 세번째였다. 처음 만났을 때 두 문장 이번에 한 문장.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떼는 걸 보는 기분.
 "여기 사는구나."
 "응."
 잠시동안 어색하기 짝이 없는 침묵이 흘렀다.
 "언제부터 살았어?"
 "오래됐어."
 "그렇구나."
 와중에도 나는 소년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라도 불편해하면 자리를 피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저 쪽에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뭐라 안 해?"
 "뭘?"
 "저번에 나무 탄 거."
 "아, 그거… 그냥 그럴수도 있다 하고 생각하려고."
 "신고한다거나 그런 거 말야. 할 생각 없었던 거야?"
 "내가 그런 걸 왜 하겠어."
 "이상한 사람일 수도 있었잖아."
 "내가 보기에는 넌 그냥 나무 타는 걸 좋아하는 애 같았어. 이상한 거 아니잖아."
 "나는 내가 이상하게 보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렇게까지 자기폄하할 필요는 없는데. 그런거야말로 기우라고 하는거야."
 "기우구나."
 순간 그가 정말로 나보다 어려보였다. 이제 갓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라고 해야 할까, 하얗고 투명해서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것은 손끝에 와닿는 눈이었고 그 애는 눈으로 빚어진 소년이었다. 가만히 살짝 내리다 아침햇살에도 쉬이 사라지는 그런 것이었다.
 "지레짐작이었구나."
 "괜한 걱정이야."
 "그럼 앞으로 나무 올라가도 되는 건가? 상쾌해서 좋아하거든."
 "굳이 나한테 허락 구할 필요는 없지. 올라가고 싶으면 올라가. 대신 조심해야 돼. 다른 사람들 눈이라던가, 떨어지지 않게."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사실 나도 나무 좋아해. 애들이 나더러 단풍 보느라 흡혈귀 오는 것도 모를…"
 "그만 가볼게."
 소년이 갑작스럽게 말을 끊었다. 칼같이 잘라내는 바람에 하마터면 알아듣지도 못하고 말을 이을 뻔했다.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으로 그 애는 빠르게 나를 지나쳐 나무들 사이로 사라져갔다. 그가 간 곳을 한참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서서히 아침 해가 뜨면서 이슬 맺힌 풀잎들이 드러났다.

 그 다음날은 일요일이라 아침부터 기숙사가 분주했다. 아직도 머리에 까치집을 지고 비몽사몽인 녀석이 있는가 하면 벌써 구두끈을 매고 있는 학생도 있었다. 대개의 경우 나는 약간 빠른 편에 속했다. 오늘은 넥타이를 바로잡는 중이었고. 일요일이라고 대충 입었다가는 사감이 바로 불호령을 내릴 참이었다. 나가면서 침대 위에 놓아두었던 성경책을 집어들고 최대한 빨리 교회로 향했다.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는 항상 시끄러웠다. 이 지역 사람들의 1/3 가량은 이 교회에 다녔고 거기에 각지에서 온 학생들이 끼어있었다. 나이 든 노인들의 살짝 걸걸하면서도 억양이 구불구불한 목소리, 어린 아이들의 높고 맑은 음성, 젊은 남녀의 빠른 말투를 듣다보면 속세에 나온 수도승의 기분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째선지 주변의 활기도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이미 1년의 모든 일요일 동안 반복했던 일들이라고 느껴졌다. 저번주에도 본 사람들이고, 다음주에도 또 앉을 자리이고, 내가 항상 가지고 있는 옷인데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한마디로 말해 만사가 지겹게 느껴졌다는 얘기다. 내가 앉아있다는 사실 자체도 의자의 감촉도 갑자기 견딜 수가 없었다. 예배가 시작되어서 망정이지, 그냥 나가버리는 줄 알았다. 끝날 때까지 집중하지도 않고 계속 깍지낀 손가락만 응시했다.
 예배가 파하고 나오면서 나가던 클래스메이트를 붙잡았다. 성경책을 쥐여주며 부탁했다. 내 기숙사에 가져다달라고. 다음 번 숙제를 베끼게 해주는 조건으로 친구는 흔쾌히 응했다. 나는 멀어져가는 그를 뒤로한 채 멍하니 걷기 시작했다.
 가을 바람이 많이 서늘해졌다. 이 바람도 이제 한 달만 나이를 더 먹으면 겨울바람이 되겠지. 1년은 나이를 빨리 먹는다. 며칠 뒤면 11월이고 또 얼마 안 있어 눈이 내릴 것이다.
 "진짜 미치겠네."
 "뭘?"
 뒤를 돌아보자 소년이 나무에 기대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왔는지도 몰랐다. 내가 너무 주변에 무관심했던 건지, 아니면 저쪽이 고양이 같은 것인지. 혹은 둘 다였을지도.
 "너였어?"
 "어. 근데 왜 그러고 있어?"
 "날짜 보니까 시간이 너무 빨라서. 여름방학엔 집에 가 있다가 9월에 새 학기 시작하고 저저번주에 시험치고. 좀 있으면 또 11, 12월이잖아. 1년이 금방 가."
 "겨울 오면 눈 오겠지. 단풍 볼 날도 얼마 안 남았네."
 "아 맞다. 내년 가을까지 버텨야지 뭐. 그런데 너는 눈 내리면 나무 못 타지 않나?"
 "옷 젖고 좀 미끄러운 정도야."
 "하지 마. 떨어지면 다쳐."
 "딱히 걱정하는 사람도 없어."
 "내가 안 괜찮으니까 하지 마."
 "네가 걱정한다고?"
 "그러고보니까 오늘 말 많이 한다?"
 "말 돌리지 마."
 "알았다고. 어쨌든 올라가지 마. 저번에도 솔직히 떨어질까봐 조마조마해 죽는 줄 알았어."
 소년이 나를 빤히 바라봐서 나는 새삼 그의 눈이 얼마나 큰지 알았다. 처음 봤을 때도 크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그땐 놀라서 그런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정말 크다. 너 눈이 참 예뻤구나, 문장이 방울졌다. 굉장히 맥락과 동떨어지는 주제임에도 말이 굴러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뜬금없는 소리는 그가 먼저였다.
 "내 이름 버키 반스야."
 "버키 반스?"
 "그냥 버키라고 불러."
 "알았어… 버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름은 알려주는 거야?"
 "걱정해주길래."
 "그건 너무 당연한 거잖아."
 "일종의 영역 공유라고 생각하면 될거야. 네가 나를 신경쓴다는 건 그 사실 자체로만 머무르진 않아. 나를 받아들였다는 얘기잖아."
 말을 마치고 버키는 손깍지를 꼈다가 다시 풀었다.
 "그래서 나도 이름 알려준거야."
 "사소한 걱정을 해준 정도인데 네가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닐까 싶어."
 "너는 초면부터 이름 알려줬잖아. 그리고 어제 새벽에도 날 이상한 사람 취급 안 했고."
 "그건 네가 다쳤을까 싶어서였지. 겨우 이걸로 다 된거야?"
 기준치가 너무 낮은 것 같아서 우려가 되었다. 사소한 걱정을 해준 것 뿐인데도 그는 나를 친구로 여겼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약간 질투심도 났더랬다.
 "잠깐만, 그럼 나 말고 다른 친구도 있는거야?"
 "아니. 너만. 왜, 신경쓰였어?"
 "솔직히 말하자면 다른 애를 더 좋아할까봐."
 그러자 버키는 웃었다. 동시에 나는 내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깨닫고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왜 교회에서 극심한 권태감을 느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예의 그 낮은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내 앞의 아이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었다. 교회 안에서 동시에 쿵쿵대던 수십 수백개의 심장들 중 내 것은 보이지 않는 한 사람 때문에 느리게 뜀박질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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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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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1910년대 배경 기숙학교물입니다 :)


 엄마가 준 목도리는 진한 파란빛이었는데 그게 좀 문제였다. 학교는 오래된 석조 건물이 대다수인지라 파란 걸 걸치고 그 사이를 걸어다니면 눈이 다 시렸다. 이왕 주실 거면 좀 따뜻해보이는 빨간색을 주시지 그랬느냐, 하고 편지에 장난스럽게 적어 보냈더니 돌아온 답장. 엄마가 또 깜박했어. 미안해 스티브. 활자 너머 엄마의 쑥스러운 얼굴이 보여서 큭 웃었다. 그리고 책 사이 가지런하게 편지지를 넣어두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파란 털실 목도리는 약간 골칫덩이였더랬다.
 단풍나무들 사이에 숨어있는 것이 우리 학교였다. 캠퍼스 주변에 왜 그렇게 단풍이 많았는지 모르겠다. 아마 설립자가 이 곳 경치를 보자마자 반해서 사들였을지도. 9월 학기가 시작될 때는 학교 입구가 아직 초록빛이었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다가 시험이 끝나고 나면 어느새 10월 중순이다. 그걸 알아챌 때 쯤 고딕 리바이벌 건물들은 화사하게 피어있는 그해의 마지막 꽃무리에 파묻혀있었다.
 단풍을 보면서 우리는, 그러니까 나와 기숙사 룸메이트들은 설립자가 꽤나 자신의 미적 감각에 심취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했다. 그렇게 얼굴 모르는 이를 놀리면서도 우리는 사실 그에게 고마워했다. 특히 내가 그 정도가 심해서 다들 농담거리로 삼을 정도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캠퍼스에 나와서 수업 종이 칠 때까지 단풍을 바라보았다. 그도 안 되면 복도 창문에 닿아있는 단풍 가지, 그것이 충족해주었다. 수줍어서 얼굴이 빨개진 상태에서도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노라고 속삭이는 것 같아 손가락 끝으로 차가운 유리를 몇 번이나 쓸었는지 모른다. 가을 하늘 아래에 흐드러진 마지막 식물꽃은 수천 날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 속에 고아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와 함께. 올 수 없어서 더욱 그리워지는 17살의 나를 기다린다.

 학교는 오래된 곳이 그렇듯이 괴담이 많았다. 수위실의 검은 고양이가 사실 매부리코 라틴어 선생의 정체라는 풋냄새 나는 우스개에서부터, 밤에 잠을 못 자게 하는 으스스한 이야기까지. 그 중에서도 제일 인기가 많은 동시에 야유를 받는 이야기는 학교에 뱀파이어가 산다는 이야기였다. 그 괴담이 인기가 많은 것은 흥미로워서였고, 동시에 야유를 받는 것은 이 시대에 무슨 같잖은 흡혈귀 동화냐는 거였다. 그리고 으레 이야기를 꺼낸 당사자에게는 장난스러운 꿀밤이 날아들었다.
 소문은 전형적인 뱀파이어 이야기였다. 이 근처에 100년은 족히 산, 소년 모습의 괴물이 있다고. 내 친구의 지인이 봤다더라, 수위가 학교 근처의 언덕에는 얼씬도 말라고 하는 걸 들었다더라 하는 말이 끝나고 나면 100살 먹었다던 그 소년도 사실 산더미같은 숙제와 시험이 지겨워서 '토껴버린' 우리 학교 학생이 아니냐 하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날도 그렇게 다들 농담을 하고 있었는데, 룸메이트 하나가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야, 너는 더 조심해라. 만날 얼빠져가지고 밖에 싸돌아다니다 물릴라."
 "내가 만난 흡혈귀는 모기밖에 없단다, 이 가엾고 딱한 중생아."
 왁자하게 웃음이 터졌는데 하필 깐깐한 라틴어 선생이 들어오고 말았다. 우리는 낄낄거리는 걸 간신히 멈추고 재빠르게 자리에 앉았다. 뱀파이어는 이미 흔적도 없었다. 다만 수업 도중에, 눈치없는 한 녀석이 라틴어 선생에게 혹시 선생님은 고양이가 변신한 것이냐는 질문을 던졌다가 등짝을 맞은 것은 예외다.

 내가 파란 목도리를 두르고 다닌 것은 사실 쓸 만한 게 그것밖에 없어서였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 짐을 싸다가 목도리를 2개 넣으려니 트렁크에 자리가 없을 것 같아 빼두었는데 그게 후회되었다. 스카프도 몇 장 챙겨오긴 했지만 목도리가 최선이었다. 쨍한 파란색이라 더 추워보이는 단점이 있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날은 목요일, 21일, 10월이었다. 그애를 만난 날을 차가운 숫자로 표시할 수밖에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하얀 손이 서늘했더랬다. 항상 더 잡아주지 못해서 미안했는데.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나는 어느덧 사랑하게 된 그 파랗고 추운 목도리를 그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 애는 그것을 가지고 영원히 내 곁을 떠났다.
 목요일은 변함없는 시간표의 고통이다. 지루한 교실 책상 앞에 몸을 우겨넣고 수업에 집중해야 한다. 아무리 성실하게 강의를 들어도 어느 하루는 어째 집중이 안 되고 지겨운 날이 있는데, 목요일, 21일, 10월이 딱 그런 날이었다. 그해의 마지막 식물꽃이 흐드러지게 붉었던 날.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쉬는 시간 종만 애타게 기다렸다. 30분이 20분으로, 10분으로 그리고 5분으로 줄어들 때까지 시계를 몇 번이나 들여다봤는지 모르겠다. 마침내 종이 치자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2층 복도로 내려갔다. 빈 교실이 많아 사람이 적은 곳이어서 느긋히 쉬기에 좋은 곳이었다.
 복도 중간 즈음에서 창틀에 걸터앉았다. 가끔 가다 학생 몇 명이 천천히 지나가는 그 복도에서 나는 햇살을 받으며 만년필을 만지작거렸다. 아, 괜히 들고나왔나 싶다가도 또 이리저리 돌리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다 별 생각없이 흘끗 고개를 돌려 나무를 바라봤는데, 굵은 가지에 걸터 앉아있던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나도 놀라서 벌떡 일어났는데 그 애도 덜컥했는지 하마터면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다. 당황해서 창문을 열었다.
 "괜찮아? 미안, 사람이 있는 줄 몰랐어. 안 다쳤어?"
소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아직도 놀라서 눈이 커진 주제에 말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수줍음이 많아서 그렇겠지 하고 넘겼다. 나는 계속 말을 걸었다.
 "진짜 괜찮아? 어디 안 긁혔어?"
여전히 끄덕끄덕. 여기서 더 참견했다간 무례일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가기도 뭣했다.
 "스티브 로저스야. 3학년 D반. 혹시 볼 일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와."
 "-니야."
 "잘 안 들려."
 "이 학교 학생 아니라고."
 순간 맥이 탁 풀려서는 왜 대낮에 남의 학교에서 나무를 타고 있느냐고 물어볼 뻔했는데 마침 수업 종이 울렸다. 나는 가보겠다는 말만 던지고 황급히 계단을 뛰어올랐다.

 좀 어이없는 애다 싶으면서도 이상스럽게 자꾸 기억에 남았다. 피부가 왜 그렇게 하얬을까 하는 생각이 미치자 나는 그냥 고개를 흔들었다. 남의 살 하얀 게 뭐 어떤데. 그리고 금방 잊어버리고 말았다. 라틴어 다음 수업이 수학이었는데, 느닷없이 삼각함수 쪽지 시험을 보겠다는 선생의 말에 그 소년은 그만 씻겨내려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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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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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벜... 이기는 한데 스티브에 대해 서술한, 거의 독백 수준의 글.
종교가 있는 분들께는 불편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ㅠㅠ 주의해주세요.


내가 태어난 것은 아버지가 전사한 지 두 달 정도 됐을 때 일이었다. 어머니는 그날도 정신없이 환자들을 돌보다가-결핵 병동의 간호사였으므로- 진통을 느꼈다고 한다. 한창 힘들 때인데도 쉬지 못하고 생계를 꾸린 보람도 없이 나는 허약한 몸으로 태어났다.
적은 수입으로 나를 돌보던 어머니의 삶은 공황으로 더욱 큰 타격을 받았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식탁 위에는 어머니가 손질하다 만 천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낡은 옷을 수선해서 어떻게든 입을 만하게 만들거나, 정 안되면 밀가루 포대로 옷을 지으려는 시도들. 그리고 코피를 닦아낸 휴지로 차 있던 휴지통.
내 병원비만 아니었다면 엄마는 더욱 살 만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확실히 그랬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몸뚱이는 나 뿐만이 아니라 엄마의 삶도 갉아먹고 있었다. 그 식탁에서 천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던 것은 꼬마가 아닌 징그러운 벌레였다.
나는 엄마한테 동화책을 읽어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이미 너무 피곤할 테니까. 엄마도 집에 들어오면 간신히 씻고 힘없이 자기 방에 들어가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가끔, 드물게 일찍 퇴근하는 날에는 나를 안고 이야기를 나직한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엄마의 엄마, 그들이 떠나온 아일랜드, 그리고 유럽 땅에서 죽어간 로저스 씨.
아빠라는 단어보다는 로저스 씨가 더 익숙했다. 그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으므로. 그리고 그의 아들 또한 죽음에 익숙했다. 많이 아팠으니까. 더 어렸을 적에는 죽음이 무서웠었다.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는 아이의 말에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그런 생각 하지도 말라며 나를 끌어안고 울었다. 나는 거기서 죽음이란 무서운 거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공포에 질려 울지도 못했다.
어린 아이는 공포를 극복하려고 애를 썼다. 더 정확하게는 애써 무서운 것을 잊으려고 발버둥쳤다. 뛰어노는 아이들을 구경하다가도 엄습하는 생각. 나는 영원히 저렇게 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곧 저 광경도 못 보지 않을까. 신경은 예민해졌고 걸핏하면 날카로운 반응을 야기했다. 벌레는 더욱 외톨이가 되었다.
죽으면 어디로 가냐는 질문 이후로 엄마는 나를 데리고 교회에 가곤 했다. 그것도 시간이 있을 때 부리는 사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생계 걱정은 죽음보다 앞섰다.
엄마가 기도를 드릴 때마다 나도 옆에서 두 손을 맞잡았다. 10살 때까지는 그랬다. 11살 때부터 나는 믿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무 대답이 없는 신을 내가 왜 믿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적어도 나는 받은 것이 없으니 계약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혼자 나를 끌고 가야 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고통스러울 때마다 끄적이는 시간이 늘어난 것을 깨달았고, 그 다음부터는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다. 실력은 제법 늘어갔다. 엄마는 나에게 스케치북을 사주었다. 그림은 그렇게 내 세상이 되었다.
한 장 한 장 늘어가는 낙서들. 점점 그림이 되어가고 나만의 생각을 담기 시작한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 외로움. 고립감. 그것을 한 데 담아서 연필로 풀어냈다. 가끔씩은 손이 생각을 따라가지 못해 괴로울 정도였다. 스케치북은 나에게 일기였다. 어느 면에서는 적확한 표현이다. 엄마에게 내가 그린 진짜 그림들은 보여주지 않고, 최대한 밝게 그린 낙서들만을 자랑했으니까. 엄마는 내 속마음을 눈치챘을까, 아니면 속아 넘어갔을까? 분명한 것은 나는 내 세계에 혼자 잠식되어 갔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나는 작은 세상의 군주가 되었다. 이것은 A이고, 저것은 무엇무엇하다. 가끔 들어오는 엄마의 가르침이 모르타르가 되어주었다. 어떠한 사람이 되어주렴. 혹은 네 아빠는 이러저러한 분이었단다. 나는 그것을 네, 하고는 받아들였고 질척질척한 진흙 벽돌 속에 이겨넣었다.
12살 즈음에는 도시가 꽤나 크게 완성되어 있었다. 그것을 구체화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나는 건물들 사이를 공허하게, 홀로 돌아다녔다. 나 자신을 구성했지만 그것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것을 완성시킨 게 맞나? 내가 느끼는 이곳은 정말 있는 것일까? 내 눈구멍으로 도시를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아무리 홀로서봤자 결국에는 남 없이 성립할 수 없던 듯 하다. 마구 벽을 두드리다가 결국에는 지쳐서 아무 감정 없이 드러눕는 해질녘들이 이어지고. 오늘도 아이가 집 안에 누워있네. 아참, 시체였지. 아니면 공기였던가. 그도 아니면 벌레?

왜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집 밖으로 나왔던 저녁, 골목길에서는 맞고 있던 아이 하나가 있었다. 어쩌다 날라리들과 시비가 붙었는데, 말다툼을 좀 하나 싶었더니 손이 날아왔다.  한참 그렇게 맞고 있는데 갑자기 주먹질이 멈추더니 고함이 들렸다. 퉁퉁 부은 눈 너머로 새로운 인영이 보였다. 불량배들이 그와 실랑이를 벌이다 자리를 떠났다. 그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괜찮아? 아마 뭐 그런 말이었던 거 같다. 나는 웅얼웅얼 대답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했다. 순간 코피가 흘러나왔다. 소년은 나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더니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저기, 저쪽 블록에. 기억은 잘 나질 않지만 대충 이러한 서사였다. 버키가 나와 친구가 된 것이 오래 전 일인데다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탓이다.

사소한 것이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 버키의 경우는 후자였다. 어느날은, 그가 사과 몇 알을 들고 우리집에 놀러왔다. 함께 바닥에 누워 사과를 먹었다. 사과꼭지와 함께 가만히 늘어놓은 나의 이야기를 그는 비웃음도 걱정도 없이 그저 들어주었다. 내가 정말로 원했던 것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그런 것. 그렇게 버키는 내 일상으로 스며들어 삶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그가 점점 더 소중해졌다. 나도 모르게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버키가 유쾌한 일을 겪으면 나도 행복했고 우울해하면 나도 슬펐다. 그는 나를 자신과 하나로 여길 때도 있는 것 같았다. 버키는 내 둘도 없는 형제, 나의 아버지, 그리고 친구였다. 나에게 숨을 불어넣어주었다.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몸뚱이를 이끌고 악착같이 이승에 붙어있던 시간이다.

전쟁이 터져 그와 내가 군입대를 하고, 우리 둘은 전쟁터에서도 함께 다녔다. 어느날 오후, 평소대로라면 나와 영화를 가지고 열띤 토론을 했을 그 시각에, 버키는 내 눈앞에서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
그 이후로 나는 썩어가고 몰락해가고 있다. 처음으로 어스카인의 하얀 수염을 쥐어뜯어버리고 싶었다. 술에 취하지 못하는 몸은 나를 다른 의미로 괴롭힌다. 사실 나는 그것이 어떻게든 고통과 죄책감을 덜어내려는 책임 전가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어스카인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어쩔 수 없는 거짓말쟁이임을 곱씹는다.
버키는 아마 몰랐을 것이다. 나는 끝끝내 쫓기고 있었다. 그와 있다 보면 가끔 누군가 내 옆에서 치근덕거리곤 했다. 처음에는 어깨를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정도였는데 시간이 지나자 팔을 잡아 흔들더니 이제는 내 살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견딜 수가 없어서 그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나였다. 고립감과 외로움은 어느새 내가 되어있었다. 나를 뜯어먹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
버키는 내가 잡아먹히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나는 결국 한번도 그를 내 가장 안쪽으로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말했다가는 끝이 없을 것이다. 저것은 나이기 때문이다. 도망칠 수 없는 영속적인 병이 버키를 지치게 만들고 결국에는 나를 떠나게 만들까봐 말하지 않았다. 아무리 가까워도 결국 그는 스티브 로저스가 아니라 제임스 반스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가? 무엇인가? 이렇게 자학하고 모든 것을 망쳐버리는 게 내 스스로의 본질이었던가? 본질은 또 무엇일까. 내가 그린 그림들, 로저스 씨, 아니면 어린 날 들었던 엄마의 기도였나? 십자가가 아직 그 자리에 있다면 절 도와주세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 당신의 자비를 저에게도 베풀어주소서. 그날의 시계가 멈춘 이래로 무한히 지속되는 고통 속에서 몇 천 번을 비명지른 구절.
내가 뭘 하는 걸까. 당신 없이도 나는 살았는데. 나에게 생명을 가져다 준 건 교회 속에 틀어박힌 당신이 아니라 버키였는데.
당신은 끝끝내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신을 끌어내버렸다.
Posted by I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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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자 정도의 짧은 글.
오랜만에 쓰니까 잘 안 풀리네요 ㅠㅠ


나는 그를 볼 때면, 유치한 소리인지는 모르겠으나 대리석상이 떠오른다. 그것들은 오랫동안 흙 속에 묻혀 있다가 후세 사람들이 발굴해낸 경우가 꽤 잦은 편이었다. 그렇게 발견된 이후에는 온갖 미사여구와 이야기가 덧붙여져 박물관에 전시된다. 생각해보면 낯뜨겁긴 해도 그에게는 딱 맞는 이야기다. 다만 피 한방울 없는 돌덩이에게서도 느껴지는 생기가 결여되었을 뿐이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스티브를 집 밖으로 끌어내었다. 그냥 놔뒀다가는 또 기껏 얻은 휴일을 온종일 집 안에 틀어박혀 보낼는지도 몰랐다. 요새 그가 개인적인 일로 바깥 공기를 쐬는 것은 운동 뿐이었다.
-운동은 좋아. 근데 다른 것도 좀 해야 할 것 아니야?
그는 주변의 소음이 시끄러운지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어쩌면 그냥 내가 나가자고 한 게 싫었을지도.
-고맙긴 한데…
-천만에. 몸도 좋으면서 그걸 내놓을 생각을 안 하는 게 안타까웠거든.
나는 부러 그의 말을 농담으로 막아버렸다. 그의 눈살이 더욱 가늘어진다. 그러나 오래 갈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정확히 4초 후, 찌푸린 표정이 탁 풀렸다. 그리고는 유순하면서도 어딘가 허탈한 웃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요새 그림을 못 그리겠어.
-그림을? 네가?
잔 안의 커피가 출렁거릴 때 흘러나온 목소리였다. 둥근 표면을 훑으며 매끄러지는 검은 액체가 묘하게 LP판을 연상시켰다. 그 리듬에 맞춰 천천히 나오는 어조가 마치 옛날, 남자들이 외출할 때 모자를 반드시 쓰고 다니던 시절의 음악 같았다. 아마 중절모였을 것이다. 내 눈앞의 젊은 청년도 쓰고 다녔을.
-안 그려져. 그냥 뭘 그려야 할지도 모르겠어.
-구체적으로 말해주겠어?
그는 잠시 상기하는 눈치였다.
-정말 모르겠어. 뭘 그려야 할지도 생각이 안 나고… 얼핏 떠오르는 게 있다 싶으면 손이 안 가는 식이지 뭐.
그 말을 하면서 그는 스트로우를 연필 잡듯이 쥐고 테이블 표면을 이리저리 그었다.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
빨대가 그의 흰 손에 끌려다니는 게 보였다. 덕분에 점점 구깃구깃해지고 있었는데, 밝은 진홍색었던 탓에 우그러진 것이 감춰졌다.
-너무 부담 가지는 거 아냐? 내 말은,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자꾸 자신을 몰아세우는 거 아니냐는 거지.
-내가?
-너는 그런 경향이 심한 편이지.
자석에서 클립을 잡아떼듯이 눈길을 스티브에게 돌리고는 말했다.
-정말 그리고 싶은 게 뭐야? 혹시 마음에 담아놓은 건 있어?
돌려 말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러기엔 지나치게 노골적이다. 그가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한참, 그렇게 골똘히 쳐다보더니, 별안간 빨대가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모르겠어.
그 말을 하는 파란 눈은 텅 비어있었다. 빨대가 도르르르 구르다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Posted by I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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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8일 스른전 리/02 부스에 냈던 버키멸팁 회지 두 권 통판합니다. 기간은 3월 6일 일요일까지예요. 사양과 자세한 사항은 폼을 참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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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틀님 커미션입니당!!!


왜 네가 안 들어가고.”

하워드, 내가 만나러 갔다간 스티브는 더 큰 충격을 받을 거야. 일단은 네가 먼저 들어가서 납득을 시킨 다음에 나와 만나는 게 나아.”

하긴 그게 나을지도 몰라. 잘 생각했어, 페그.”

하워드가 문고리를 돌렸다. 그녀는 말없이 오랜 친구가 병실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실, 그녀가 보고 있던 것은 하워드가 아니었다. 간호사에게 무언가 얘기를 듣고 있던 침대 위의 젊은 청년이었다.

청년은 2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전체적으로 선량하고 반듯해 보이는 인상과 하얀 피부 덕에 더 어려 보였다. 사실 페기는 알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순수한 사람인지. 그리고 얼마나 수줍은 청년인지. 얼마나 평범하고 착하기만 했던 사람인지.

그래서 나이를 먹어버린 하워드를 보고, 스티브가 그 얼굴을 비통함으로 일그러뜨렸을 때, 그녀는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허망함 뿐이었다. 20년의 세월은 그에게 그 어떠한 것도 주지 않고 지나가 버렸다. 가슴이 메어오는 것을 잊으려고 그들은 애써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러나 지나가버린 시간은 어떡해서든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키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스티브, , 지금은 많은 것이 변했다는 걸 알 거야.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천천히 받아들이면..”

하워드가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들었어요, 하워드. 결혼했다면서요. 축하해요. 그리고 페기, 남편은 좋은 사람일 거예요. 난 알아요.”

고마워, 스티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많은 것이 변했겠군요. 그래도 괜찮아요. 당신들이 내 곁에 있으니까.”

“……”

소련이 적이 되었다니 정말 놀라워요. , 전쟁 때부터 삐그덕거리기는 했지만.”

스티브.”

하지만 난 다른 건 몰라도 이 사실만큼은 납득이 안 돼요. 선과 악이 불분명하다는 것. 물론 문자 그대로는 받아들일 수 있겠죠. 하지만.. 하지만 이제는 불투명한 회색 지대가 존재한다는 게 마음속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네요.”

지금은 45년이 아니야, 스티브.”

페기의 말이 살아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활자로만 느껴졌다.

네가 생각하는 세상은 이미 20년도 더 전의 일이 되어버렸어.”

 

대체 옛날이란 언제죠, 페기? 나한테는 겨우 몇 시간 전의 일이에요.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나이를 먹어버린 당신과 하워드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거죠? 너무나 바뀌어버린 이 세상은? 나만 빼놓고 다들 변해버렸어. 나만 빼놓고 다들 버키, 버키의 죽음을 극복한 것 같아.

페기와 하워드 앞에서는 애써 침착을 가장했지만, 막상 그들이 가고 나면 끝없는 우울증에 빠져든다. 그것이 지금의 스티브였다. 그는 끊임없이 자문했다. 나는 무슨 꼴이 된 거지? 시대에 뒤쳐진 낙오자? 살아서 걸어 다니는 박제?

젊은 청년, 나 좀 도와주겠어요?”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딘가 부자연스러움을 느끼면서. 한 노부인이 발목을 잡고 쩔쩔매는 것이 보였다.

이런, 어딜 다치셨나요?”

보도 블록에 잘못 걸리는 바람에 발목을 접질렸어요. 저기 골목까지만 부축해 줄 수 있나요?”

뭔가 이상하다. 금방이라도 공기가 터질 것만 같다.

군인의 직감이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

저 멀리 거리에서 무시무시한 굉음이 터져 나오는 동시에 노부인이 쓰러졌다. 스티브 또한 넘어졌지만 금방 일어날 수 있었다. 다행이 노부인은 크게 다치지 않은 듯 했다.

부인, 저기 안전한 곳으로 가 계세요!”

그는 냅다 연기가 피어 오르고 총과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 쪽으로 뛰쳐나갔다. 한 블록을 뛰자 그는 가슴이 턱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숨이 차서가 아니다. 공격 당한 건물이 페기와 하워드가 있는 SSR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뿌옇게 먼지가 일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거기에는 한 무리의 습격자들이 있었다. 러시아어로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다. 미국과 적국 사이가 되었다던 소련의 공작원들인 듯 했다. 그가 언뜻 하워드의 모습을 본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누군가, 아마 페기의 고함이 들렸다.

스타크가 붙잡혔다! 저 자들이 스타크를 납치해가려 해!”

더 이상 볼 것도 없었다. 그는 주변에 있던 차 한 대의 유리창을 부수고 차 문을 열었다. 깨진 유리 조각에 긁혀 피가 흘렀지만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핸들을 잡은 그는 놈들이 몰고 온 듯한 차 중 하나에 돌진했다.

!

안에 타고 있던 자가 푹 고꾸라졌다. 그 자신도 얼얼한 것도 잠시, 그는 재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이제 한 놈. 어디 보자, 나머지가…”

그리고 그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의 앞 저 멀리서 한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한 쪽 팔이 금속으로 되어 있는 남자. 온 몸을 검은 옷으로 두르고 얼굴은 마스크로 빈틈없이 가린 무시무시한 남자. 그는 다가오면서 옆에 있던 부하 중 하나에게 기관단총을 받아 들었다. 스티브는 순간 피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피해, 스티브!”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차 아래로 내던졌다. 다음 순간 유리조각이 무시무시하게 날아들었다. 총알이 날아와 그가 앉아있던 차 좌석을 무자비하게 벌집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아주, 아주 약간의 시간만이라도 지체했더라면 스티브의 머리가 칼에 찔린 수박마냥 뚫렸을 참이었다.

저 작자하고 싸우려면 무기가 필요해! 누가 내 방패 좀 가져와 봐!”

스티브가 고함을 쳤다.

캡틴 로저스! 당신 방패 여기 있어요!”

요원 중 하나가 큰 소리로 외치며 그에게 방패를 던져 주었다.

방패가 날아왔다. 이상하게도, 갑자기 스티브는 저 멀리 유럽의 눈 쌓인 협곡으로 다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미안해, 페기. 하지만 지금은 그 때와 다를 바가 없어. 지금 이 순간과 다른 게 뭐지? 뚜렷한 적들이 있고, 나를 돕는 이들이 있는 이 순간과?

듀간이 나에게 필요할 거라며 방패를 던져주던 그 날, 하울링 코만도스가 내 뒤를 서포트해 주던 그 시간들, 선과 악이 뚜렷하던 그 시절..

남자가 스티브에게 총을 쏘았지만 비브라늄 방패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방패로 총을 막아내던 그는 남자의 팔을 내리쳐 총을 떨구게 했다. 놈의 복면을 거칠게 잡아 뜯었다. 그 순간이었다. 귓가에 아련히 울리는 목소리.

지금은 45년이 아니야

어쩌면 이 때만큼은, 페기의 말이 맞았는지도 모른다.

버키?”

버키란 놈이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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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님 커미션] 하워드스팁  (0) 2015.12.01
Posted by I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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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님 커미션입니다! 아마 셀린 디옹의 My Heart Will Go On 들으시면서 읽으셔도 좋을 듯...!



어느새 내 나이가 유언장을 쓸 나이가 되었다니 세월이 빠르기만 하다. 여러 일을 겪고, 여러 감정이 켜켜이 쌓인 나날들이었다. 벌써 수십 년의 세월을 함께 해 준 나의 아내 마리아 스타크와, 내 자랑스럽고 소중한 아들 토니에게 먼저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그리고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나의 충실한 친구였던 에드윈 자비스에게도 고마웠다는 말을 전하며, 43년 이후부터 가장 가까이 있어줬던 페기 카터에게도 끈끈한 동료애를 전한다.

스타크 인더스트리와 그 외 기타 다른 자산에 관해서는 이전에 서술해 둔 서류를 내 변호사가 맡아두고 있으니, 본론으로 들어가려 한다. 이 유언장은 내 삶, 그리고 내가 죽은 이후의 일에 관해 유언하는 내용이다.

내 장례에 대해 서술하기 전에 먼저, 내 삶에 대해, 그리고 어떤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하려 한다. 이것은 장례 방식을 이해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이야기이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1943, 프로젝트 리버스라 명명된 한 국가적 비밀 프로젝트에서였다. 당시 SSR에서는 나치 독일에 맞서기 위한 슈퍼 솔저 양성 계획을 세웠는데, 그 계획의 책임자가 고() 아브라함 어스킨 박사와 나, 하워드 스타크였다.

최초의 피실험자를 채택하기 위해, SSR에서는 군인 훈련 캠프를 하나 세워 특별히 모집한 여러 청년들을 그곳에서 비밀리에 훈련시켰다. 훈련 담당자가 바로 나의 오랜 친구인 페기 카터 여사와 체스터 필립스 대령이었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얼마 안 있어 박사와 대령은 훈련병 중 하나를 피실험자로 채택했고, 그 청년이 바로 스티브 로저스였다.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실험 전의 그는 믿을 수 없이 허약했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겨우 43kg밖에 되지 않았을 정도였으니까. 훈련을 어떻게 감당한 것인지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선택된 것은 어찌됐든 그였고, 나는 박사와 함께 프로젝트 리버스를 감행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그토록 허약했던 청년이 보통 인간의 4배에 달하는 신진대사와 체력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뭔지 모르게 내 마음을 끌었던 것은 그의 성품이었다.

이 유언장을 적으면서도 느끼는 것이 하나 있다. 텍스트, 글로 적는 문자로는 도저히 그의 성품을 옮길 수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건실하다, 이타적이다, 용기 있다, 그런 단어만으로는 그를 묘사할 수 없다. 그나마 희생적이라는 단어가 근접할 뿐이다. 그것은 직접 겪어봐야 아는 것이다. 직접 곁에 있고, 그를 겪어본 사람만이 그가 얼마나 목숨을 바치고 싶게 만드는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반스 병장은 그랬으니까.

반스 병장은 어릴 때부터 그의 절친한 친구였다. 지나쳐 보일 정도로 친해서, 가끔은 다른 짖궂은 코만도스 대원들이 마치 갓 결혼한 신혼 부부 같다고 놀릴 정도였다. 평소 그 둘을 가지고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나였지만 이상하게도 그 농담만큼은 치기 싫었다. 어찌되었건 그 둘은 어딜 가나 붙어 다녔다. 가끔은 페기가 질투하고, 나까지 질투심이 날 정도로. 사실 그 때부터 나는 그에 대해 호감을 느끼는 동시에, 그가 버키를 구하려고 적진에 홀몸으로 들어간 사실에 알 수 없는 질시를 알아채곤 했다.

한편 내가 시기심을 느낀 것은,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버키 뿐만은 아니었다. 어느 날부터 나는 내 절친한 친구 페기와 그 사이의 묘한 기류를 느끼기 시작했다. 내심 질투가 났고, 이번에는 버키 때보다 더욱 큰 감정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그에게 서서히 느끼기 시작하는 그 어떤 강렬한 감정보다는 젊은 20대 남녀 간의 애정이 더욱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그저 겉으로는 그 둘에 대해 낄낄대며 놀려댈 뿐이었다. 이봐, 퐁듀 대위는 어떤가. 카터 요원이 요새는 퐁듀 얘기를 안 꺼내나 봐? 반스 병장도 이 얘기 알고 있어? 그리고 얼굴을 수줍게 붉히는 그를 보면서 속을 끓이는 수밖에.

하지만 그 때가 차라리 나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내가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던 때는 버키 반스 병장(그의 시신도 끝내 찾을 수 없었다)이 아르님 졸라를 생포하는 임무에서 전사한 직후부터였다. 예전에는 그토록 가깝기만 했던 그 밝은 청년이 어느새 내 손끝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리 떠나버렸다. 버키의 안타까운 죽음에 슬퍼하던 나는 스티브마저 그렇게 될까 봐 무서웠다. 나에게서 멀리, 아주 멀리 떠나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는 그런.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그 어떤 다른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버키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기를 원할 뿐이었다.

페기를 보라고, 하울링 코만도스 대원들을 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를 봐서라도 그런 목숨을 내던지는 행위는 그만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와 버키 사이에는 그 어떤 강력한 것,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버키가 떨어진 이후 계속해서 스티브를 그 산 밑으로 끌어당기는 듯 했다. 마치 너도 어서 오라는 듯이.

그리고 끝끝내 그가 추락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레드 스컬은 마침내 전 세계적인 공격을 감행하려 하고 있었다. 내가 분석해 봤을 때, 그 상황대로라면 그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SSR의 모든 이가 당황했다. 하울링 코만도스 중의 한 사람이었던 모리타의 한 마디로 그 상황이 설명될 것이다. “이제 어떡합니까? 가서 문을 두드릴 수도 없고.”

하지만 한 사람만큼은 당황하지 않았다. 스티브였다. 그가 말했다.

왜 안 됩니까? 가서 두드립시다.”

그가 임무를 나가기 직전, 그 때 꼭 해줘야 했던 말이 있었다. 반드시 해야 했었다.

네가 나를 두고 어떻게 먼저 저승에 간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었지? 내가 그렇게 너를 걱정하고, 깊게 생각한다는 것을 너는 알고나 있었을까? 알고나 있었냐고!

그런데도 나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예감을 무시하고 싶은 안이한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나는 망설인 대가를 지금 이 순간까지도 치르고 있다.

하울링 코만도스가 임무를 떠난 후, 나는 전에 없이 안절부절 못 하고 랩 안을 왔다갔다 거렸다. 결국에는 참다 못해 SSR 본부 건물 밖으로 외투도 입지 않은 채 뛰쳐나가곤 했다. 바람이 나를 맞았지만 그렇다고 미친 듯이 날뛰는 내 속의 천불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가 페기가 필립스 대령과 함께 다른 병사들을 이끌고 출동했을 때, 나는 참다 못해 그 병사들 중 하나에 끼어 나가려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안 그래도 내 불안한 작태를 가만 두지 못하고 병동으로 실어 나를 기세였던 것이다. 나는 그 때 발작이라도 일으킬 듯한 상태였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에게 물어왔다. 스타크 씨, 왜 이러세요, 괜찮으십니까? 두통약이라도 좀 드시겠어요? 스타크 씨, 스타크 씨, 스타크 씨, 하워드. 나는 그런 모든 이들에게 닥치라고 외치고 싶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몰라. 내가 지금 어떤 심정인지.

마침내, 페기와 대령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뿐만은 아니었다. 다른 하울링 코만도스 대원들도 함께 온 것이다. 간신히 버티고 앉아있던 의자를 박차, 나를 제지하는 조수를 밀치고 랩 밖으로 달려나갔다. 이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괜찮은 척은 할 수 없었다.

스티브는? 그는 어디 있는 거야?”

듀간이 말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캡은 레드 스컬을 쫓아서 발키리에 올랐어요. 지금은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애써 무시했던 마지막 예감이 불길하게 엄습해왔다. 그것은 끊임없이 그의 모습을 재생했다. 티 하나 없이 푸르르던 그의 눈, 환하게 햇살을 반사하던 그의 금발, 내 실없는 농담에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 하는 그의 앳된 모습, 내가 만들어준 방패를 보며 신기해 하던 그, 그리고 하워드,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

그것들은 이제 나를 떠나려고 하고 있었다. 그 모든 기억을 안타까움과 추억으로 남긴 채.

 

나는 마지막 실낱 같은 희망에 매달려 레이더로 발키리를 찾으려고 힘들게 애를 썼다. 그러나 잡히지 않았다. 극지방이라 레이더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이제 그를 찾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마지막으로 페기와 대화를 나누리라는 직감이 찾아왔다. 아마 페기는 내가, 하워드가 도울 수 있다면서 그를 말리려 애쓰겠지. 하지만 그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레이더 앞에서 일어나 통신실로 갔다. 어리둥절한, 혹은 이해할 수 있다는 눈빛들이 나를 쫓아올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통신실로 향하는 동안 생각했다. 페기와 함께 그의 마지막을 보내주어야 할까? 지금이라도, 페기와 함께 그를 말려볼까? 덧없는 생각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다시 쓸려 내려갔다. 아니나 다르랴, 통신실에 도착하니 페기의 말소리가 들렸다. 결국 그에게 나는 끝까지 좋은 친구 하워드 스타크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 때 들어가면 아마 그와 최후의 한 마디라도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결국에는 다짐했다. 안에 들어가지 않기로.

평생 내 품 안에 안을 수 없었던 사람의 마지막마저 다른 이와 나눠야 하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마침내, 통신실에서 페기가 흐느끼며 나올 때, 나는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뒤로 몇 년, 아니 몇 십 년 간을 그를 찾으려 노력했지만 번번히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서 나는 고심 끝에 최후의 결정을 내린다. 내가 죽으면 시신을 화장해, 그 재를 스티브 로저스가 추락했지만 끝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던 바로 그 빙하에 뿌려주기를 바란다. 이것은 나의 마지막 소원이다.


                                                                        1987 7 4

                                                   하워드 앤서니 월터 스타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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