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0자 정도의 짧은 글.
오랜만에 쓰니까 잘 안 풀리네요 ㅠㅠ


나는 그를 볼 때면, 유치한 소리인지는 모르겠으나 대리석상이 떠오른다. 그것들은 오랫동안 흙 속에 묻혀 있다가 후세 사람들이 발굴해낸 경우가 꽤 잦은 편이었다. 그렇게 발견된 이후에는 온갖 미사여구와 이야기가 덧붙여져 박물관에 전시된다. 생각해보면 낯뜨겁긴 해도 그에게는 딱 맞는 이야기다. 다만 피 한방울 없는 돌덩이에게서도 느껴지는 생기가 결여되었을 뿐이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스티브를 집 밖으로 끌어내었다. 그냥 놔뒀다가는 또 기껏 얻은 휴일을 온종일 집 안에 틀어박혀 보낼는지도 몰랐다. 요새 그가 개인적인 일로 바깥 공기를 쐬는 것은 운동 뿐이었다.
-운동은 좋아. 근데 다른 것도 좀 해야 할 것 아니야?
그는 주변의 소음이 시끄러운지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어쩌면 그냥 내가 나가자고 한 게 싫었을지도.
-고맙긴 한데…
-천만에. 몸도 좋으면서 그걸 내놓을 생각을 안 하는 게 안타까웠거든.
나는 부러 그의 말을 농담으로 막아버렸다. 그의 눈살이 더욱 가늘어진다. 그러나 오래 갈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정확히 4초 후, 찌푸린 표정이 탁 풀렸다. 그리고는 유순하면서도 어딘가 허탈한 웃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요새 그림을 못 그리겠어.
-그림을? 네가?
잔 안의 커피가 출렁거릴 때 흘러나온 목소리였다. 둥근 표면을 훑으며 매끄러지는 검은 액체가 묘하게 LP판을 연상시켰다. 그 리듬에 맞춰 천천히 나오는 어조가 마치 옛날, 남자들이 외출할 때 모자를 반드시 쓰고 다니던 시절의 음악 같았다. 아마 중절모였을 것이다. 내 눈앞의 젊은 청년도 쓰고 다녔을.
-안 그려져. 그냥 뭘 그려야 할지도 모르겠어.
-구체적으로 말해주겠어?
그는 잠시 상기하는 눈치였다.
-정말 모르겠어. 뭘 그려야 할지도 생각이 안 나고… 얼핏 떠오르는 게 있다 싶으면 손이 안 가는 식이지 뭐.
그 말을 하면서 그는 스트로우를 연필 잡듯이 쥐고 테이블 표면을 이리저리 그었다.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
빨대가 그의 흰 손에 끌려다니는 게 보였다. 덕분에 점점 구깃구깃해지고 있었는데, 밝은 진홍색었던 탓에 우그러진 것이 감춰졌다.
-너무 부담 가지는 거 아냐? 내 말은,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자꾸 자신을 몰아세우는 거 아니냐는 거지.
-내가?
-너는 그런 경향이 심한 편이지.
자석에서 클립을 잡아떼듯이 눈길을 스티브에게 돌리고는 말했다.
-정말 그리고 싶은 게 뭐야? 혹시 마음에 담아놓은 건 있어?
돌려 말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러기엔 지나치게 노골적이다. 그가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한참, 그렇게 골똘히 쳐다보더니, 별안간 빨대가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모르겠어.
그 말을 하는 파란 눈은 텅 비어있었다. 빨대가 도르르르 구르다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Posted by I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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